<7> 동학난 진압 의병분대장
 
남태욱 교수
안중근이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해주에서 신천이란 산골마을로 들어가 살던 중  15세에 동학난이 발생했다. 1894년이었다.
 
1894년은 우리가 갑오경장의 해로 더 잘 알고 있는 해이지만 이 갑오경장의 원인을 바로 동학난이 제공한 것이다.
 
1894년 1월에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민란이 발발하여 파죽지세로 승전을 거듭하여 급기야 4월에는 전봉준이 전주를 점령함에  위기를 느낀 조정이 5월에는 청국군대를 원군으로 불러들였고 6월에는 일본군을 청했다.
 
 이에 청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대립갈등 관계에 있다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이 승기를 잡자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단독의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여 일본은 동학난 진압의 대가로 장차 자기네 진출의 전초작업으로 조선 조정에 일본식 신문물의 수용과 정치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그 개혁이란 것이 그동안 누천년의 우리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순 서양식 일본식 정치경제사회문화법률 전반에 걸친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갑오년의 경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동학난은 이처럼 척왜 양이(斥倭洋夷)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이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조정 관리들의 폭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순수한 농심의 발로에 기인한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의 결과를 야기 시켰다. 일본군이 이땅에 진주하여 국정을 논단하였으며 국내의 사회전반에 서세가 자리잡게 된 기폭제역할 밖에 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백성에겐  나라자체를 잃게되는 비운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 동학이란 무엇인가? 동학난은?
 
동학은 문자그대로 학문의 일분야이다.
 
동학이 있기 전에 조선에는 일찍부터 서학이 전래되어 있었다. 1784년을 한국의 천주교 발생기원으로 삼는데, 천주교는 외래종교가 아닌 한국의 자생종교로 교황청에서도 인식하여 다른나라와는 달리 취급하고 있음이 한국천주교의 현실이다.
 
조선의 실학자들이 중국과 왕래하면서 서학을 접하게되었고 동양사상 즉 유불선교에 기초를 둔 동양학과 실용에 기초한 서양학을 비교 종합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당연히 인간세계와 우주 및 천국(하늘나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명쾌히 규명하고 있는 천주교의 교리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천주교는 학문연구 과정에서 깨닫게 된 천주의 진리에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져서 학문적으로 기반이 조성되었으며 누구의 전교도 없이 성령의 작용으로 인하여 자생적으로 교회가 성립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알게 된 서학으로 동양의 심오한 철학에도 깊이를 더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동양학과 서양학은 서로 대립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조하여 학문을 더욱더 진지하고 폭넓게 현실에 부합되는 학문으로 성숙시키는 협조자적 관계로 나아갈 수있는 것이며 그 당시 실학자들의 학문연구 자세도 그러하였다.
 
적어도 서학과 천주교의 국내적 바탕은 이러하였다.
이러한 서학과 천주교에 대하여 동양학적 입장에서 발생한 학문이자 종교가 동학이다.
 
그 시조는 최제우(1824~1864)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문란기를 살면서 억울한 백성의 극심한 고난을 함께 경험했으며 고뇌하던중 구도행각에 나섰으며 울산 유곡에 은거한 지 10년만에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간, 적멸굴에서 49일간 도를 닦고 마침내 경주 용담정에서 동학의 교리를 완성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한다. 그 중심내용은 시천주(侍天主--천주를 모심),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섬김을 하늘 섬기듯 하라)이다.
 
수운(최제우의 호)선생이 도를 닦아 나온 결론이 그것이다.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할 때 상제(上帝)로부터 받은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至)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것이 뜻하는 바가 최제우 자신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가 시천주에 대해 해석을 붙인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和)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의 뜻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학의 경전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시천주의 뜻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면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천주를 정성껏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최제우에게서 초월적 신은 상제·천주·한울님 등으로 나타나며 내재적 신은 지기(至氣)로서 나타난다. 즉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과 우주를 주재하는 초월적 신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내재적 신의 성격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예는 〈용담유사〉 〈안심가 安心歌〉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의 예는 〈용담유사〉 〈교훈가〉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최제우의 경우 한울님은 초월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성격과 내재적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상 daum백과사전에서 인용]
 
이러한 결론은 필자의 경험에 의해서도 타당한 결론이다.
 
 지극히 도를 닦으면 닦을 수록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와 인간 및 삼라만상을 끊임없이 주재하시는 천주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이 더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천주의 분신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친근감이 더욱 더욱 강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결과 도달되는 결론은 사람은 소우주라는 결론이다. 그리고 예수는 내친구라는 결론이다.
 
억압받은 백성에게는 민심이 천심 즉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 되었고 이는 곧 백성을 짓밟는 폭정에 충분히 항거할 수 있는 폭력행사의 기초이론이 되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 들끓는 민심에 이러한 인내천사상이  접합되어 폭발적인 소요사태로 비화하고 급기야는 외세에 의해 국가가 강점당하게된 원인이 동학이요 동학난이다.
 
우리의 의인 안중근 안의사께서는 武人이시라 동학의 학문적 의미는 세세히 따져 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동학난 그건 안된다. 보국안민 좋지만 국가 소요사태를 이렇게 야기시켜서는 안된다. 조정의 힘으로 막지못하는 폭도로 인해 청국을 불러 들이고 일본을 불러 들이지 않았느냐.
내 비록 조정의 지시도 없고  아무런 벼슬도 없는 일개 백성의 한사람이지만 국가적 혼란을 막고 평온을 되찾아야 한다.
누란의 위기에 선 나라를 지키고자 우리마을 장정 70명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구성했으니(엄밀히 말해 의병이란 조정이 모집한 민간병력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주민병력은 군민병이다--필자 주)  내가 좌시할 수없다.'
 
 이렇게 해서 나선 것이리라.
 
이리하여 16세 안중근이 6명의 장정을 이끌고 2만여명의 동학군을 패퇴시키게 되었다.
(당시 패군가운데 백범 김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전황(戰況)은 아래와 같다.
 
 그날, 동학군의 괴수 원용일이 도당 2만여명을 이끌고 기세도 당당하게 쳐들어 오는데 깃발과 창과 칼이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 호각소리,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데, 의병은 그 수가 70여명을 넘지 못하여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랐다.
 
 
때는 12월 겨울철이라 갑자기 동풍이 불고 큰비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키 어렵자 적병은 갑옷이 모두 젖어 찬기운이 몸에 배어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한 십리 쯤 되는 마을로 진을 물려 밤을 새는 모양이었다.
 
그날밤 중근의 아버지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만일 오늘밤에 우리가 먼저나가 적병을 습격하지 않으면 내일 앉은 자리에서 적병의 포위공격을 받게되면 우리는 전멸할 것이다".하고 곧 정병 40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병정들은 본동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중근은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서 선봉겸 정탐 독립대가 되어 전진수색하면서 적진 대장소가 있는 지척에 까지 다다랐다. 숲 사이에 엎디어 적진 형세를 살펴보니, 기폭이 바람에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아 대낮같은데, 사람과 말들이 소란하여 도무지 기율이 없으므로, 정탐대장 중근이 동지들을 돌아보며 이르되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것이다"고 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얼마안되는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당적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중근대장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고 했다.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함부로 모아 놓은 질서 없는 군중이다. 우리 일곱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저런 난당은 비록 백만 대중이라도 겁날 것이 없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뜻밖에 쳐들어 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방략대로 좇으라"고 했더니 모두들 응락하여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중근의 호령 한마디에 일곱사람이 일제히 적진의 대장소를 향해 사격을 하니 적병은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기계(안의사는 총을 "기계"라고 자주 표현했다)도 들지 못한채 서로 밀치고 밟으며 흩어져 달아 났다. 그러나 이윽고 동이 트자 적병이 비로소 이쪽 형세가 외롭고 약한 줄을 알아차리고 포위공격을 해왔다 한다. 그 뒤로 본진의 원군이 포위망을 뚫어 주어 두 진이 합세하여 적군을 패퇴시켰다 한다. 전리품으로 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군량은 천여푸대요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명이었으나 우리편은 한사람도 손해도 없어 하늘에 감사하고 만세를 세번 부르며 본동에 개선하여 본도 관찰부에 승첩보고를 알렸다.
 
이로부터 적병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안이 태평해 졌다.(이상 전황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의 내용을 옮긴 것임)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기사입력: 2007/06/04 [16:40]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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