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위대한 거인
안중근 의사 독립투쟁 유적지 탐방기
 
김야원 / 한국항공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생이라면 누구나 해야 한다는 매일 아침의 신문 정독 중에 발견한 조그마한 기사.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97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와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주최가 되어 독립 투쟁 유적지 대학생 탐방단을 모집한다는 한 손바닥 남짓한 기사였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뜻 깊은 취지를 가진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대학생이란 신분으로서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지원했고, 운이 좋게 선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기사와 내 안에 남아있던 작은 애국심을 계기로 나의 탐방은 시작되었다.
 
출발 당일, 한껏 설레이는 마음이 밤새 줄창 내리는 빗줄기에 살짝 걱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폭우로 인해 출발지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속초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또 러시아까지 타고 갈 배가 안전하게 출항 할 수 있을지 에 대한 걱정에 잠시 주춤했지만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우리의 뜻을 하늘도 알아주실꺼라 믿고 마음을 다잡았다.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행히 우리가 탄 동춘호는 순항을 했고, 배를 타고 국외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고 가뜩이나 멀미에 약한 나는 많이 걱정했지만, 깔끔한 실내 환경과 안정된 항해로 편안해질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날씨가 생각처럼 좋지 않아 선상에서 진행되진 못했지만 실내에서의 강론회에서 처장님께 안 의사님의 생애와 우리의 전반적인 일정에 관해 다시금 설명을 들었다. 출발 전 나름대로 사전지식을 공부하고 왔지만 훨씬 더 전문적이고 상세한 설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2살의 그, 10대엔 유년기를 보냈고 20대엔 동양사상에 심취했고 30대엔 서양 사상(천주교)에 빠져있던 그. 그 길지 않은 시간을 어쩌면 이다지도 알차고 뜻 있게 보냈는지 절로 숙연해졌었다. 강론회를 마치고 돌아온 침대 위에서 나라면,아니 내가  32살까지 남은 나의 7년을 지금의 내 위치에서 그 분의 나라를 사랑하는 그 뜻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을 이번 탐방의 내 목표로 삼아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렇게 첫날 밤을 보냈다.
 
둘째 날 아침, 개운하게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러시아다. 얼른 친구들을 깨워 카메라를 챙겨 갑판 위로 나갔다. 우리에게 잘 공개되지 않은 낯선 사회주의 국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설레였다. 갑판 위에서 처음 본 러시아의 풍경을 너무나 예뻤다. 한적한 시골 항구마을인 자루비노는 딱히 러시아임을 느낄 만한 것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색을 가진 산과 풀과 바다가 어우러진, 저 멀리 예쁜 건물들이 지어진 섬을 갖고 있는 매력적인 마을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하선을 하고, 입국장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러시아인 세관원들을 보며 마음은 더 부풀어만 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입출국 수속절차는 매우 까다로웠다. 사회주의 국가라서일까, 약간은 융통성이 부족한 나라임을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면세점에서 러시아의 명물인 마뜨료쉬까 인형과 쿠키를 사와 우리의 첫번째 목적지인 크라스키노로 이동하는 차에 올라탔다. 아직은 서먹한 우리 탐방단 식구들과 쿠키를 나누어 먹으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러시아의 모습을 보며, 러시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도착한 곳은 주가노프다리 아래쪽에 세워진 단지동맹비 였다.

 단지동맹비는 안 의사님을 비롯해 11동지가 손가락을 단지하시고 그 선혈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르며 동맹을 결의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다. 사실 이 비는 실제로 동맹을 결의한 지점, 연추하리에 세워져야 마땅했지만 그곳은 너무 외지고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조금만 비가 오면 통제가 불가능 해 참배객들의 발길을 쉽게 하기 위해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갔던 당시에도 그 전 날의 비로 접근이 어려웠다. 우리에겐, 우리의 역사에는 너무나 중요한 곳인데 제대로 둘러볼 수 조차 없는 보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특히나 단지동맹비의 보존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파렴치한 누군가의 행패로 훼손된 비석의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처장님의 지시로 비석을 닦으며, 비석에 씌인 글을 읽으며, 비석의 모양을 보며 그 불꽃 같은 마음이 내 안에서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가슴 한켠이 그렇게 아릿해지며 그곳을 뒤돌아 나왔다.

 러시아에서의 일정을 마지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에게서 이제 또 어떠한 곳이 우리를 맞아 줄까 하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중국으로 가는 입국 절차는 간단했고, 입국장을 나서자 마자 중국 특유의 거대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풍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훈춘으로 이동하는 내내 조선족 가이드 언니의 박식한 역사해설을 들으면서 더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올 수 있었다. 언니가 중국 호텔은 한국 호텔에 비해 China 일 테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과 다르게 너무너무 좋았다. 편히 휴식을 취하고 멋진 회의실에서 각자 그날 탐방한 지역에서 느낀 느낌들도 공유하며 강론회도 하고, 그 날 저녁, 우린 훈춘 야시장을 구경하며 이것저것 선물도 사고 특이한 꼬치구이도 먹고 사진도 찍고 추억들을 만들었다. 몸과 마음은 조금 지쳤지만, 보람이 있던 하루를 생각하며, 야시장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셋째 날, 맛있는 호텔 조식 뷔페를 여유있게 즐기고 나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은 권하촌과 방천, 도문다리, 대성(용정)중학교, 윤동주 시비, 혜란강 등 이다. 권하촌은 안 의사님이 석달 정도 기거하셨다는 두만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에서 의사님이 행하신 거사들에 대해 생각하고 계획하셨을 것이란 생각에 절로 숙연해졌다. 북/중/러 국경 접합지인 방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두만강은 너무나 가까워서 반가움과 동시에 이런 형태로 와서 봐야 한다는 사실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방천은 정말 어디로 세 나라를 나누어야 할 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접합해 있었다. 과연 당시 독립군들의 주요 활동지가 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이 있어 우리 안 의사님께서도 하얼빈으로 건너 가실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에 다시 돌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간 도문다리는 내게 아픔으로 기억되어 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연결한 도문다리는 말 그대로 다리였다.여의도에 놓여진 수많은 다리들보다도 훨씬 짧은, 내 걸음으로 5분도 채 안 걸릴 그 길이 뒤에 북한이 있었다. 다리 위에서 본 망원경으로 북한 건물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멋진 백두산도 볼 수 있었다. 참 슬펐다. 그 다리를 절반만 걸어갈 수 있단 사실이.다름아닌 중국 땅을 통해, 입장료를 내고 그 다리를 밟아야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 아픈 기억을 꼭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다음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용정중학교는 탐방을 떠나기에 앞서 내가 제일 기대했던 일정 중에 한 곳이었다. 그 곳은 중학교 시절 나와 친구의 우상이었고 한창 내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윤동주 시인이 다니신 학교이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내가 윤동주 시인의 그 한 맺힌 시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할수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름 항상 시집을 들고 다니며 친구와 함께 서로 시를 읊곤 했었다.그런 시인이 학창시절을 보낸 그 곳을 방문하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였다. 막상 방문해 보니 윤동주님 말고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 곳 출신이었다. 그 분들 모두가 큰 뜻을 품고 학창시절을 보냈단 사실에 너무나 자랑스럽고 그곳을 계속 보존하고 계신 분들이 고마웠다.일정을 마치고 두번째 묵게 된 호텔은 둘째 날의 호텔보다 훨씬 더 좋은 호텔이었다. 다소 빡빡한 일정에 지칠까 싶어 편히 쉬라고 좋은 호텔을 잡아주신 관계자 분들게 참 감사했다.
 저녁식사 후 시작된 연변대학 교수님의 강연은 정말 멋진 시간이었다. 안 의사님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라는 처장님의 설명에 기대는 했지만, 해박한 지식과 일반인이알기 어려운 여러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설명이 매우 흥미로웠고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런 분들이 있어 안 의사님의 업적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잠깐의 시내관광 중에 우연히 우리처럼 한국에서 온 김좌진 장군 탐방단 식구들을 만났다. 낯선 타국 땅에서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온 그들을 만나며 어찌나 반가웠던지서로의 일정을 무사히 잘 마치기를 바라며 헤어졌다.
 
넷째 날, 새벽부터 기상이다. 오늘은 백두산에 가는 날이다. 백두산도 다 둘러보고 저녁때 하얼빈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제 시간에 탑승하기 위해 조금 일찍 서둘러야 했다. 날씨가 화창해서 천지를 꼭 봤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24년간 살아오면서 항상 내 마음속에 거대하고 웅장한 이미지로 자리잡아 있는 백두산을 실제로 보러가는 길이라 설레이고 떨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중국을 통해 가고 있는 이 현실에 속이 상했다.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가 최고였다. '이제 백두산을 보는구나' 하는 마음도 잠시, 입구에 떡 하니 씌여있는 '장백산'. 마치 원래부터 이 산은 장백산이었고, 백두산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단 것처럼 크고 장엄한 글씨로 씌어져 있던 그 글자에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내 안에서, 나 뿐 아니라 4800만 우리 국민 안에, 북한 동포들 안에, 조선족들 속에 여전히 '백두산'으로 존재하리란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백두산은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산이었다. 눈길 닿는 곳곳마다 진 풍경이었고 예술이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개 또한 느껴지는 산이었다. 구비구비 꺾어지는 산 고개가 하나하나 다 웅장하고 혼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오는지 착각했을 정도로 힘찬 물줄기를 거세게 내뿜던 장백폭포 역시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비록 정상에서 날씨가 좋지 않아 천지를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우리의 백두산이 내게 전해주고 자 했던 기와 혼을 느끼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얼빈까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탐방 일정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안 의사님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거사의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100년 전, 안 의사님께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신 바로 그 곳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내 가슴에 맴돌았다. 과연 나는 책을 통해, 사진을 통해 보아왔던 그 곳에 도착해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 것인가.
 
다섯째 날 아침, 나는 채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내려서 안 의사님께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곳에 서 있었다. 어떤 누구도 거기가 그런 역사의 현장이었단 사실을 알 수 없을 만큼 아무런 표지판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세모와 네모 모양의 표싯돌만 위치한,그것도 그나마 올해 설치했다는, 그러한 곳에 졸린 눈을 하고 서 있었던 내가 창피스러웠다. 100년 전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 안 의사님께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짐과노력과 혼이 담겨 있었을지 지금도 감이 오질 않는다. 그 곳에 서서 나는 부끄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그리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얼빈 역을 나와 하얼빈 영사관, 제홍교에 들르고. 리조림 공원 안에 세워진 유묵비에 참배를 했다. 안 의사님께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위해 하루에도 몇시간 씩 서서 계획을 구상하셨다던 제홍교, 실제로 가 보니 시야도 잘 확보되지 않는 그 곳에서 서 계시면서 얼마나 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까 하는 안 의사님을 생각하니, 그 마음이, 그 뜻이 너무나 소중하고 더 크게 와 닿았다.

 이 날 우리의 숙소는 조선족 교육기관인 '만방중학교'였다. 실제로 거기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만나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좋은 교육시설에서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교육받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뿌듯했다. 깨끗한 기숙사에서 피곤한 몸을 편히 휴식할 수 있어 너무나 좋았다.
 
여섯째 날에 찾아간 731부대는 너무나 끔찍했다.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한 그 곳의 각종 실험 장면과 기구들은 그 당시의 고통스러움을 고스란히 내게 전해주었다. 어디선가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 듯 했고, 고통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 했고, 내 몸 속에 세균이 번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잔인하게 행하여진 그 현장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희생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찌 사람으로써 같은 사람에게 이리도 모질 수 있었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저녁, 다시 야간 열차를 타고 탐방의 마지막 목적지인 대련으로 향해야 했다. 이제 정말 막바지였다. 초반에 예상보다 빡빡한 일정에 조금 지쳐 7박8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는데 벌써 내일이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아쉽기도 하고 과연 내가 일정을 잘 소화해 내고 있는가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대련은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매우 깨끗한 항구 도시였다. 길가에 쓰레기들도 찾아볼 수 없었고, 도로정비나 기타 시설들도 매우 깔끔했다. 바다를 끼고 있어 해양성 기후를 띄고 있는 데도 전혀 습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오늘은 안 의사님께서 순국하신 여순 감옥과 여순 지방법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동안 안 의사님의 이동 경로를 따라 탐방을 해온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더 숙연해지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여순 감옥으로 향했다.

 여순감옥이 위치한 그 곳은 군사보호지역이기 때문에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감옥에 들어가면 외국인은 본래 관람이 허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말을 해서는 안되고 한글에 새겨진 우리 단체 조끼와 모자도 착용해선 안된다고 했다. 울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조끼를 벗던 찰나, 다행히 감옥 관계자와의 만남으로 무사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감옥에 들어서자, 습하고 어두운 그 곳은 무서웠다. 각종 고문기구와 처형대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두려움이 생겼다. 과연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럽지만 자신이 없었다. 안 의사님께서 머물던 독방은 다른 감방과는 조금 달랐다. 책 걸상도 있고, 작게나마 창문도 나 있었고. 안 의사님을 회유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데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 의사님의 높은 인격과 그 능력을 말이다. 작은 창문에 살짝 드리워진 햇살에 그 독방이 어찌나 기개있고 청렴하던 의사님을 담고 있던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으로 찾아간 안 의사님께서 재판 받으신 법원에서, 직접 재판이 행해진 방에 들어가 앉아 볼 수 있었다. '아,이 곳이었구나. 여기서 결국 사형을 언도받으셨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만감이 교차되었다. 충분히 항소해 사형을 면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의연하게 재판을 받으셨을 그 분을 생각하며 마치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듯이 몸이 떨렸다. 여순 지방법원을 잘 보존해주고 있는 세계일보에 고마움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공식적인 일정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인천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중국 땅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7박 8일 간의 일정동안 돌아본 역사의 현장에서 나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이 시점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리도 치열한 시대에 살지 않아서, 목숨을 내거는 투쟁이 항상 요구되는 세상에 내던져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로 입고,먹고,마시고,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어 감사했다. 이전에 그저 당연히, 하지만 약간은 안일하게 애국지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이제는 절실히,너무나 가슴에 와 닿게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더 소중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세대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각을 가진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어느 자리,어떠한 모습으로 있던지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을 하며 살아가야 겠다는 마음 속의 확신이 생겼다. 사실 요즘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나를 다시금 바로 잡아준 안 의사님께 너무 감사했다.
 
중국 곳곳에 세워진 안 의사님의 뜻.

 그저 잊혀졌다고만 생각했던 의사님은 내가 알지 못했을 뿐이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기억하며 그 뜻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넓은 땅덩이의 수많은 영웅들을 제치고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당당히 '협객'으로 남아계신 그 분의 뜻에 가슴이 뜨듯해졌다.

 동시에 우리나라 역시 우리 세대 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계속 그 뜻이 이어지도록 좀더 힘쓰고 지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깊이 통감했다.

 

기사입력: 2007/05/08 [21:53]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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