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독립운동은 진행형
 
천진희
  비통한 시대를 살다간 도마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고뇌와 번뇌의 깊이를 가늠하며 나의 부끄러운 7박 8일간의 탐방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빗줄기는 속초항에 향하는 동안에서도 여전히 굵었다. 일행들은 남산에서 발대식을 마치고 서둘러 대기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 오는 남산은 운치가 그만이었다. 고소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일행들은 돌아가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러시아와 중국에 도착했을 때 주의 상항도 들었다. 

  고속버스가 강원도 인근으로 들어서자 흙더미로 덮인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막바지 장마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곳은 강원도 산간 지방이었다. 도로 복구 작업이 한창이라 일행은 태운 고속버스는 유실된 도로를 빗겨 달렸다. 4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속초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역사의 현장 속으로 가는 구나. 비를 맞고 있는 바다위에 동춘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역사의 한 순간을 찾아가기 위해 사건의 현장 속으로 이방인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시대를 살다간 안의사를 만나러 가는 우리가 동시대의 인물로 겹쳐졌다. 배낭을 짊어지고 오른 화물선을 개조한 동춘호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각자의 방을 배정받고 나니 짙은 안개 속에서 동춘호는 유유히 항해를 해나갔다. 저녁 식사후 선실에서 일행은 모여 안의사의 항일운동 경로와 생애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고 배 멀미로 고생할 거라는 생각은 빗나갔다. 밤바다의 낭만을 느껴볼 생각을 했지만, 내리는 빗속에서 밤바다는 아무것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과 뱃고동소리만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물살은 생각보다 잔잔했고, 우리는 다음날 자루비노 항에 도착 했다.

  드디어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에 도착을 했다는 기쁨도 잠시 지체하는 입국수속 때문에 지치기 시작했다. 대원들 모두 치친 상태에서 이동을 하기 위해 대기하던 버스를 올라탔다. 처음 찾는 낯선 땅이었지만, 산세의 모습은 꽤 익숙했다. 들판에 피어있는 쑥부쟁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들은 우리 눈에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들판에는 나비들이 꽤 많이 날아 다녔다. 날씨가 화창해서 였을까? 우리민족의 시원이었던 발해의 옛터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 옛날 저 넓은 들판을 말을 타고 달렸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동한 곳은 안의사의 첫 시발점인 연추하리를 찾았다. 연추하리는 고려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터라고 했다.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은 지금 찾아 볼 수가 없고 숲만 우겨진 상태여서 차가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다. 안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자르고 결의 한 곳이 이쯤 어디라고 하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무성하게 자란 숲만이 있었다. 자른 무명지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기 위해 젊은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절박했단 말인가. 그만큼 절실한 독립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고 추론을 할 수 있다. 단지동맹비는 작은 길에 모셔져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들의 가슴은 뜨겁게 절규하며 자른 무명지가 어디쯤엔가는 묻혀있을 것이다. 손가락의 행방을 알 길이 없고 생각보다 인적이 없는 이곳에 누가 찾아 와서 원혼들의 아픔을 달래줄지 걱정스러웠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국경지대를 넘어오면서 많은 시간들을 지체했다.  중국으로 들어오니 이제야 막혀있던 숨통이 뚫리는 것 같았다. 훈춘시내를 들어서면서 한글간판이 즐비하자 훈춘시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함을 주는지 세삼 느끼며 훈춘호텔로 향했다.

  훈춘시에 있는 권하촌은 낡은 초가지붕이 덮여 있었다. 안의사가 머물렀다는 집은 당시 그대로 보존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일행들 모두 안은 참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차 안은 조용했다. 침대칸은 생각보다 편안했으며, 덜컹거리는 열차소리는 운치를 더해 주었다. 간간히 지나는 역무원들의 발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밤새 달린 기차가 도착한 곳은 하얼빈 역이었다. 서둘러 짐을 내린 우리는 숙명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백 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는 안의사와 이토가 마주친 곳에 서 있었다. 안의사는 특별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고 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에 총성이 울렸다. 안의사는 일본인처럼 행세하며 이토가 열차에서 내리고 걸어가는 순간 비스듬한 위치에서 정확하게 명중시켰고, 이토는 죽었다. 일본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이며 초대 총리대신으로 임명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실을 모욕했다. 안의사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여 그를 처단했다.
그 자리에서 러시아 군에 잡힌 안의사는 일본에게 넘겨진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지금 하얼빈 역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삼각형 모양의 표시가 되어있었다. 이곳이 안의사의 의거가 있던 장소라는 곳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며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얼빈 역 위쪽에는 다리하나가 보인다. 그 다리 이름이 재홍교라고 했다. 안의사가 이토를 죽이기 위해 재홍교를 찾았다고 한다.
역사위쪽에 위치한 재홍교는 하얼빈역사를 유리알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재홍교에서 거사를 치르기 위해 고민 하던 안의사의 모습들이 설핏 그려진다. 열차가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방향을 보며 그는 수많은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우리는 잊혀진 역사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안의사와 함께한 동지가 우덕순과 유동하가 함께 차이지아코우 역에서 이토의 사살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이지아코우역은 아주 작은 역사였다. 이곳에서 한차례의 사살계획을 세웠다고 했지만, 이 작은 역에서 이토방문을 행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안의사는 계획을 바꾸고 하얼빈으로 향했던 것이다. 

  거사를 치루기 전에 안의사는 당시 한인회의 회장 김성백 집(지금은 홍콩은행자리로)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은신하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하얼빈 공원이 있었고, 그곳을 찾은 안의사는 인생에서 가장 편안함을 찾았단 것인지 죽은 후 자신을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의사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찾았을 때 하얼빈 공원에는 비가 내렸다. 잘 정돈된 공안 안에는 안의사를 추모하는 비가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 사는 60세 이상의 중국인들이라면 안의사에 대하여 안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안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것은 중국인들에게도 충격이었고, 중국인 스스로가 항일운동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잊혀진 역사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안의사와 함께한 동지가 우덕순과 유동하가 함께 차이지아코우 역에서 이토의 사살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뤼순감옥을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한참동안 뤼순감옥 앞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한국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입장시 조용히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유인즉, 그곳이 군사지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이며 한국인들이 큰소리로 관람하는 것을 중국인들이 싫어하다는 말을 들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여곡절 속에 관람은 허락이 되었다. 작년에는 단체복도 입고 들어 갈 수 없었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우려 했던 것과는 달린 중국인 측 안내인은 생각보다 친절하게 당시 뤼순감옥의 상황을 설명을 해주었다.
 
  전시실은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더욱이 우리가 놀란 것은 안의사가 거쳐했던 독방과 교수형을 당했던 곳과 기념관까지 만들어놓았다는 것에 놀랐다. 안의사는 우리만의 영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뤼순감옥은 특이한 건물 구조를 가졌다. 처음 뤼순 감옥은 러시아가 지었지만, 러일전쟁을 패한 후 일본이 건물을 이어서 다시 지었다. 중국은 이 치옥의 역사의 현장을 보존, 후손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전시되어있는 보관 품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걷다보면 항일운동을 한 역사적 인물들의 사진을 만났다. 우리 눈에 익숙한 안중근의사의 사진을 만났다. 그리고 잠시 후 단채 신채호 선생님의 사진도 그곳에 있었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신채호선생님도 이곳에서 병사하셨다고 했다. 복도를 빠져나와 우리는 낙후된 병원시설과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해야 한 것을 목격 할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된 현장이었다. 건물의 구조는 중앙에서 바라보는 방향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어디서든지 감시를 할 수 있게 해놓았다. 

  교수형을 한 현장으로 들어갔을 때, 웬 통하나가 있었다. 나무통 안에 구겨지듯 앉아있는 시신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시신여러개를 한 통에 담아 매장을 했다고 했다. 그들은 죽음조차 편하게 맞지 못했다. 

  독방에서 지낸 안의사의 당시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책상과 침대 그리고 서예도구가 놓여있었다. 전무후무한 경우라고 했다. 자신은 일반 죄인과를 틀리며 국제 포로 법에 의해 법적 처리를 하라고 했던 안의사는 3평정도의 독방에서 자신의 자서전과 “동아평화론”을 집필했다. 더 이상 살기위해 안의사는 항소심을 하지 않았고 한다. 지금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된 뤼순 법원에는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만나본 안의사의 눈빛이 슬퍼보였다. 아침 안개가 자욱이 낀 뤼순의 형장으로 가는 흑백사진과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5분의 시간을 달라며 읽고 있던 책의 뒷부분을 마저 읽고 순국하셨다고 전해진다.

  안의사가 돌아가신 형장은 중국 측에서 비교적 보관을 잘해놓았다. 한국인들의 참배를 행렬이 끊임없이 오는 이유도 한몫할 것이라는 판단도 되어진다. 안의사의 전시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안의사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찾지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안의사의 순국이후 백 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가 지어준 한복을 입고 순국하신 안의사는 소원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치면 천국에서도 춤추겠다는 말이 귓전에 울린다.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냉정한 모습으로 과거의 시간들을 들여다 볼뿐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름 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를 뒤로 했다. 안의사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그의 가족들은 삶이 고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뤄 짐작할 뿐이다.

  안의사의 마지막 소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원했으며 독립은 안의사가 죽은 후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은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민족의 아픔으로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일제의 상흔의 흔적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독립운동은 진행형이다. (끝)
 
기사입력: 2007/05/08 [21:50]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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