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동맹 기념비 앞에 서다
 
권영임
길 떠나는 날
 
많은 비가 내렸다. 배를 타기 위해 속초로 가는 길에도, 러시아 자루비노 항에 가기 위해 탑승한 배 안에서도 끊임없이 내리는 빗줄기만 바라보아야 했다. 꼬박 밤을 달려 열아홉 시간 만에 도착한 자루비노항은 이국에 대한 설렘도 잠시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입국절차를 밟기 위해 기다린 시간은 꼬박 네 시간여가 걸렸다. 어느 순간 신속하게 진행되는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한 탓으로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무렵, 마음을 진정시켰다. 시간은 예정되어 있는데 이제 이 나라의 문화에 익숙해 져야 한다고, 그러면서 늘 바삐 조바심치며 종종걸음으로 살아야 하는 서울의 일상생활을 잠시 잊기로 했다. 그리고서 주위를 둘러보니 단재 신채호선생 방문단, 고구려유적 방문단의 이름표를 부착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역사를 찾기 위해 머나먼 남의 땅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이리도 고달픈데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그 백성들을 위해 한 목숨을 버린 안중근 의사의 삶이 조금씩 과거에서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비 떼만 날아다니는 연추하리 : 단지동맹 기념비를 찾아
 
아쉬운 땅, 원한의 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크라스키노 발해의 성터를 지나 도착한 연추하리는 험난한 길에 울창한 풀숲을 이루고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250여 가구가 살았다는 절구통, 맷돌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보지 못했다. 무릎을 덮는 들쑥과 잡초가 무성하여 고국에서도 살기 힘들어 이곳까지 흘러왔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잡초 더미 사이로 군데군데 피어있는 나라 잃은 백성을 닮은 이름 없는  하얀 꽃, 옹기종기 피어있는 달맞이 꽃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날아 다녔다. 굵은 삼베옷 빛깔의 나비는 스탈린의 이주 정책으로 또 다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원한의 혼은 아니었을까?

안중근 의사와 12명의 열사들이 무명지를 잘라 단지동맹을 맺었다는 “단지동맹 기념비”는 그 때의 결의를 다지던 열사들의 혼을 담아 횃불모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인가도 인적도 없는 산야의 한구석에 덩그마니 서 있는 기념비를 바라보는 심정은 그 곳에 살던 조선족들의 삶처럼 느껴졌다. 산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산스런 삶이 보이는데 나라 잃은 백성의 삶을 바라보아만 했던 단지동맹 열사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중국의 훈춘 : 권하촌과 방천
 
중근의사가 3개월여 동안 머물었던 권하촌은 흙벽 집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검은 솥이 걸려 있고, 조그만 마루와 작은 방이 2개, 친척의 집이었다는데 그 때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15명의 일본군 포로를 잡아 내부의 갈등까지 겪으며 국제법에 따라 살려 주었는데 살아 돌아간 포로들의 고자질로 습격을 받아 독립군이 점멸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의병과 대대적 작전을 하기로 했으나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버렸으니 안 의사는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구석진 담장 밑에 핀 봉숭아, 철 이른 코스모스는 무심하게 피어나 바람결에 흩날리며 환송을 해 주었다.
 
“닭 울음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 3강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울음소리 이웃나라에 전해지는 곳”이라는 한국, 중국, 러시아 국경 집합지인 방천의 산천은 아름다웠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북한, 중국, 러시아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다리 아래 강으로 철조망이 쳐져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달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 조심조심 건너면 북한에서 중국으로 바로 올 수 있을 것처럼 지척이었다. 통행증만 있으면 중국으로 건너올 수 있다는데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강을 건너 탈북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가운 7월의 태양은 착잡한 심정에 뜨겁게 내리꽂혔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 가겠다는 윤동주의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교를 거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는 일송정은 간데없고 먼 곳에서 일송정을 닮은 정자만 바라보아야만 했다. 일제가 나무에 구멍을 뚫어 고춧가루를 부어 봉쇄하여 결국 나무를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민족의 영산 : 백두산
 
북한에 60%, 중국에 40%가 있다는 백두산을 오른 소감은 뭐랄까, 북한을 통해서 가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다. 백두산을 통해 중국이 거둬들이는 수입이 얼마나 될까? 북한이 금강산처럼 백두산을 개방하면 중국에 뿌리는 돈을 같은 민족인 북한에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7명을 태울 수 있는 지프차가 하루에 150여대 정도 사람들을 백두산 천지 바로 아래까지 실어 나른다고 했다.

숲이 우거진 산 중턱을 넘어서자 나무 한 그루 없는 빈터가 보였다. 고산두견화라는 백두산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렸다. 꽃들도 생존을 터득한 탓인지 바닥에 아주 작게 피어나 수시로 바뀌는 날씨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천지를 보러 왔지만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오르며 발아래로 흐르는 안개와 바람에 날리는 작은 먼지만 안고 아쉽게 산을 내려와야 했다.

연길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여 꼬박 5시간을 달려온 곳이다. 중국 땅이 넓기는 참으로 넓은 곳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비옥한 땅에 끝도 없이 자라고 있는 옥수수는 5시간 내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얼빈 역과 하얼빈 공원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1909년, 31세의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세발의 총탄이 정확히 적중하였다고 하는데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본 바도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를 알 수 있었을까? 그의 신념이 알아보도록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의사는 황해도의 부호 자제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지 않고도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보장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최후에는 목숨까지 민족을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바친 것이다.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참모 중장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대한독립동맹" 조직에 참여하였고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표지판조차 설치할 수 없었던 곳에 저격 장소와 이토 히로부미가 총탄을 맞아 쓰러진 곳에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어 그 때의 현장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 주었다.

체포된 후 재판 과정에서 적장을 죽이고 패배한 전쟁포로로 대접해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일제는 끝내 잡범으로 취급하여 교수형으로 집행했다.

11월 3일 여순감옥으로 압송되어 144일 동안 단독 감방에 있으면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마무리를 다 하지 못하고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시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대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던 김성백씨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하얼빈 공원(지금은 중국의 항일투사인 ‘이조림’ 이름을 따서 이조림 공원이라 불린다) 으로 나가 거사를 준비한다. “내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어 달라. 조국이 독립하면 그 때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을 만큼 하얼빈 공원은 안 의사에게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당시 만주를 점령했던 일본군들이 이 유언을 들어주지 않고, 여순 감옥 근처 어딘가에 묻었다고 한다.

하얼빈 역으로 접근할 수 없었던 안 의사는 역이 보이는 제홍교에서 특급열차가 몇 시에 도착하는지, 어디로 어떻게 도착하는지를 살피며 거사 계획을 세웠다는 ‘제홍교’는 100년 전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얼빈 역과 하얼빈 공원과 제홍교를 돌아보는 내내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체가구 역 : 죽음의 이별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세 사람의 동지가 맞절을 올리며 죽음의 이별을 했다는 체가구 역. 세 사람 중 누군가는 반드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다.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하룻밤을 묵었다는 낡은 역사 지하 여관도 그대로 있었다.

당시에는 증기 기관차로 운행을 하였으므로 체가구 역에서 기차가 멈추어 연료를 공급받던 곳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기차가 체가구 역에서 멈추면 우덕순과 조도선 동지가 척살하기로 하고 실패하면 하얼빈에서 안 의사가 저격하기로 한 것이다.

기차는 체가구역에서 정지하지 않고 곧바로 하얼빈 역에 당도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이 알려지고 종일 서성이던 두 사람을 수상하게 여기던 차에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사건이 나자 곧 체포되고 만다.
 
731부대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전쟁포로 및 기타 구속된 사람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등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이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양팔을 묶었던 쇠사슬이 상징으로 걸려 있었다. 불도 밝지 않고 음침한 내부는 한 여름의 더위를 잊을 만큼 오싹하고 서늘한 기운이 넘쳤다.

731부대의 악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우연히 노란색 흙을 발견하여 그 흙을 퍼서 담벼락을 쌓기도 했는데 흙을 만진 사람들의 살이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험을 자행했던 일본으로부터는 어떤 배상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36년 만주 침공 시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설립한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출발하여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부대 예하에는 바이러스·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 등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 마루타란 일본어로 통나무란 뜻인데, 사람을 통나무라 부르며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하였으니  그들이 당할 극한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죄의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원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사람과 말의 피를 바꾸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산채로 내장을 하나하나 잘라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공상태에 사람을 넣으면 모든 내장이 눈, 코, 입 등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는데 왜 그럴까? 사람이 영하 몇 도까지 견딜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실험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현장에서 직접 사진과 도구들을 보니 소름이 좍 돋아 올랐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731부대장)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연구결과를 모두 미군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생체실험을 통하여 일본의 의학이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여순감옥 : 그 어디쯤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을까?
 
중국 대련에 있는 여순 감옥은 20여만 평에 275개의 감방이 있으며 갇힌 사람들이 일을 했다는 공장이 15개가 있었다. 러시아가 1902년에 짓기 시작했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나머지 건물을  증축시켰다.

 1994년 애국주의 전진기지로 선정, 전시관으로 운영되면서 중국인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인근이 군사지역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아, 중국여행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감옥을 들어갈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이기도 하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투옥돼 1936년 2월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오면 맨 처음 들리는 곳이 빛바랜 황토색과 검은 바다색을 띤 수의가 비치된 곳이었다. 이곳을 통해 수의를 갈아입고 신체검사를 통해 감방해 구금하게 된다. 각 방마다 구금된 복역자번호의 문패가 있고 각 방에는 화장실 역할을 하는 나무로 된 양동이가 있고, 짚신이 놓여 있었다.

감옥의 내부는 1층과 2층으로 분리되어 2층 바닥에 철망을 설치하여 2층에서도 1층의 복도를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문의 위쪽은 철망으로 되어 있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한 1평 정도의 독방이 4개가 있는데 특별 수감자를 다스리기 위해 제작된 독방이다. 작은 구멍이 달려 있었다. 지금은 작은 불빛이 켜져 있어 그 안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실이었다. 그 곳에 수감되어 있다 밖으로 나오면 햇살에 눈이 부셔 실명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의 참혹했던 참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독방 내부에는 변을 볼 수 있는 ‘변통’과 ‘밥통’, 우측 중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가 조그맣게 눈에 띄었다.
다양한 고문도구와 형틀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십자가 모양의 형틀은 그 곳에 수감자를 엎어 놓고 몽둥이로 내리 쳤는데 그 몽둥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못이 박힌   몽둥이였다. 형틀 위에는 작은 수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고 하는데 비명을 지를 때마다 매질이 추가되었으므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미리 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교수형장 내부의 모습은 도르레와 목을 걸기 위한 밧줄 매듭이 있고 그 아래로 원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시신의 사망이 확인되면 그 통속에 넣어 매장을 했다. 바닥에는 아래로 떨어진 시신을 볼 수 있는 유리로 된 구멍이 있었다. 형 집행 후 사망여부를 확인한 다음 사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독극물을 투여하여 살해했다.

교수형 후 살해된 시신들을 무더기로 묻었던 장소가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곳은 실제 발견될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공동묘지에서 발견될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놓은 전시실은 원통 하나에 한 사람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목과 다리를 구겨 그 위에 다시 시신을 넣어 매장된 것들이 많이 보였다. 염산병도 있는데 이것은 무릎이 굽혀지지 않은 시신에 염산을 뿌려 시신의 관절을 녹인 후 무릎을 꿇도록 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작은 병은 큰 병으로 만들고, 큰 병은 죽을병으로 만들었다는 병원은 피 냄새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병원 옆으로 해부실이 있는데 해부당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공급을 했다고 하니 감방에서 아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 의사가 순국한 자리에 흉상이 놓여 있고, 안 의사를 기리는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공식적으로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도록 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도 여순 감옥 어딘가에 안장되어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해를 찾는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고국의 광복을 그토록 원했던 안중근 의사의 유언대로 유해를 찾아 고국에 묻힐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07/05/08 [21:45]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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