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대표적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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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면 백전 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습니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지요. 백전백승이란 말입니다.
 질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허니 상대방을 몰라도 너무 모르면 이길리가 만무하다는 결론이 자명합니다.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조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놓였을때 국내 민중 가운데 친일파가 있다거나 심지어 매국을 자청하는 무리가 있음을 몰랐다던가 알고도 그러한 무리를 척결할 방도를 알지 못한 어떠한 애국 독립운동도 실패로 돌아갈 것임이 분명함도 바로 그런 연유때문이 올시다. 
 
요사히 여러가지 시민단체가 성업중이고 그 중에는 반 국가 단체도 더러  있음을 일반인들도 대략 짐작은 하고 있지만, 이들 반사회적 정치단체들이 민중의 애국적 결집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현실입니다.
 
어느사회에서나 正의 움직임이 있으면 그 반대세력이 몸에 이끓듯이 준동하는 법인데, 20세기 초 민중의 자발적인 독립운동에 초를 치고 설쳐 댄 무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일진회입니다.사회가 개화한다 어느나라가 세다 무얼하면 돈을 번다 는 정보에 혈안이 되어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가 일진회(一進會)올시다.
 
 요즘도 어쩌면 돌아온 일진회 같이 매국적으로 놀고 있는 개인, 단체들이 있습니다만, 어찌 그리 일진회 노는꼴과  흡사한지 ..., 결국 독립운동 독립전쟁이 실패하고 일본에 나라가 완전히 잡아먹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 이 일진회입니다. 국채보상운동도 일진회로 인하여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그러니 지피지기의 견지에서 일진회를 상세히 까 밝히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여겨 지금부터 까밝혀 보겠습니다.
 
일진회는 1904년에, 일본이 한국의 고문이 되어 고문정치를 시행하자, 일부 한국민이 이 고문형태의 간섭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면서 완전한 일본에의 동화를 희망하며 이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국민의 친일적인 민의를 조장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반민족 집단입니다.
 
러일전쟁때 일본의 통역이던 송병준과 구 독립협회의 윤시병, 유학주 등이 1904년 8월18일에 유신회란 것을 조직 했다가 8월20일에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된 것입니다.
 
 일진회의 4대 강령은 첫째 왕실의 존중, 둘째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셋째 시정(施政:정치)의 개선, 넷째 군정 및 재정의 정리로 하고, 이에 따라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이발)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일본에 붙음)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지역만을 중심으로 하고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의 친일세력인 이용구의 진보회와 손을 잡고 같은해 12월26일에 양회가 통합,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이 뽑혔습니다.
 
1905년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1월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 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1906년 1월6일에는 기관지로서 국민신보사를 창간하여 1910년 한일합방전까지 친일 매국행각을 자행했고, 한편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2일에는 정부탄핵문제를 제기하여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정부의 잘못이니 현정권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한다면서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같은해 7월18일 헤이그밀사사건(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우리측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과 제국주의적 침략만행을 폭로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하려 했다가 회의 시작전에 발각되어 체포됨으로서 실패로 돌아감.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진행했으므로 밀사라 한 것임)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09년 10월26일 이등박문이 하얼빈에서 안의사에 의해 사살된 이후부터는 일진회의 매국행위가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국권을 빼앗을것)안을 수차에 걸쳐 순종에게 상주했습니다.
 
드디어 1910년 8월22일에 일진회의 숙원이던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고 9월26일에 그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하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자손대대로 일본의 노비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놈들입니다.
기사입력: 2009/01/03 [19:03]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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