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독립운동하는 사람들과 그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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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국내에 머물러 국내 형편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일 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오만 방자 무례 횡포는 더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한 때 안의사가 독립전쟁의 재정을 마련해 볼 계획으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광을 캔 적이 있었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좋은 돈 수천원이나 손해를 본 일도 있고...
 
이에 가만히 앉아서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하여 여러 방면 여러 지역에서  독립 운동이 전개 되었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을 위시하여 안창호, 서재필,주시경, 지석영 등 역사 교육 국어 활동과,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독립언론, 독립협회, 보안회,신민회 등의 민간단체가 모두 1907년 당시에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다 저도 대구 사람입니다만 대구에서 발생한 대단히 자랑스런 독립운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국채보상운동이란 것입니다.
 
국채란 나라가 짊어진 빚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공채를 포함한 일체의 국가 채무란 뜻입니다.
 
1904년부터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기를 잡고 이를 계기로 일본이 독점적으로 한국에 대한 고문역할을 자임하게 되었습니다.
 
 종래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국의 간섭이나, 대등한 자격으로 한국에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순전히 힘으로 제압하고 일본의 독점적 시장지배와 정치권행사를 자행한 것입니다.
 
먼저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고, 한국에 마련된 日人 정치기구인 한국통감부는 이 차관을 일제 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습니다. 소위 신식으로 바꾸는데 쓴 것입니다.
 
 근대화란 명목으로 경찰서, 소방서,학교,우체국, 헌정연구회, 철도, 전철, 도로, 수도, 전화, 전신, 신식군대 등등으로 신속하고도 빈틈없이 바꾸어 나갔으니 촌사람들이 외관적으로 보기에는 눈부신 발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본돈을 쓴 것이 아니라 한국재정을 제멋대로 축내면서 한국민을 속여 먹였으니 이게 바로 전형적인 사기죄입니다.
 
 이 과정에서 분명 강자의 위력이 작용했을테니 강도죄도 성립하고, 무고한 백성을 죽이거나 다치게도 했을테니 살인죄, 상해죄, 폭행죄도 저지르고, 부녀자 강간도 했읕테고,
 
민족 정신 말살 교육, 역사 왜곡, 일본 신민화, 민족자본 수탈 등등 이런 일제의 갖은 만행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항능력이 없었으니 이미 한일합방이전에 우리나라는 망해 있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정부는 1905년 6월에 국채상환 및 세계보충비(歲計補充費) 명목으로 도쿄에서 200만원의 공채를 모집했으며 1907년 당시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예산은 "신식화"에 따른 세출예산에 비해 77만여원이나 부족한 적자예산인지라  이만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금은 우리들이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원은 바로 우리의 한(韓)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금 국고는 도저히 상환할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에서 못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삼천리 강토는 내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될 것이다...
 
이 국채를 갚는 방법으로는 2천만 인민들이 3개월동안 흡연을 금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이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으며, 만일 그 액수가 미달할 때에는 1환, 10환, 100환의 특별모금을 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으니, 맨 처음 시작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로 개칭하는 모임을 개최한 자리에서 서상돈(徐相敦---달성서씨요 대구의 만석꾼이다. 徐자 相자가 다 부자 였던 것 같다. 필자 주)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으며, 이에 참석자 전원이 찬성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발표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 박해령 등 16인)
 
이 운동은 국채보상회를 중심으로 전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당겨 전국 각지로 요원의 불꽃처럼 번저 나갔으니, 드디어 평남 진남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우리 안중근 의사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안의사도 이에 적극참여하여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 모금 행사를 펼치고, 안의사 부인도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진남포에서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 패물과 폐지를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는 맹활약을 했다 합니다.
 
대구 남일 패물폐지부인회, 서울의 부인감찬회,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연일부인회, 부산에선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가 활약했으며, 진주에선 당시 사회 최하류층에 속한 기생들로 구성된 진주애국부인회, 일본 유학생회(800여명), 그밖에 여러형태의 보상운동단체가 실로 눈물 어린 애국심을 발휘하여 금 은 장식품 시골 농민들의 나무판 돈까지 모았습니다.
 
대한 매일 신보,황성신문 등 언론사는 적극적인 신문 캠페인을 벌이고...
 
 
이렇게 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4만여명이 의연금을 내었고 230여 만원이 모였으나 이 운동은 일본 통감부의 탄압과 친일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더욱 개탄 스러운 것은 모금한 돈조차도 세 신문사에서 어디로 가버렸는지 증발되어 버린 것입니다.
 
(항상 홍수때 마다 느낀 바이고, 평화댐공사비 모금, IMF구제금융시 전개했던 금모으기 운동때도 필자가 느낀 바는 그 결과 사용내역이 흐지부지하다는 점입니다) 
 


기사입력: 2009/01/03 [19:00]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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