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안중근이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남태욱 교수
때는 바야흐로 1905년 을사년이 되었다. 안중근의 귀에 인천항만에서 일본과 러시아 두나라가 대포소리를 크게 울려 동양의 일대 문제가터져나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홍신부가 한탄하면서, "장차 한국이 위태롭게 되었다" 하기에 안중근이 "왜그러습니까?" 물으니, 홍이 왈,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한국을 주장하게 될 것이요, 일본이 이기면 일본이 한국을 관할 하려 들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아니한가" 하지 않는가.
 
그때 이미 안중근도 날마다 신문 잡지를 읽고 각국 역사를 서로 비교하며 고찰중에 있었으므로, 이미 지나간 과거나 현재의 국제정세의 대강은 알고 있었고, 또한 미래의 일들을 어렴풋이 추측은 하고 있는터였다.
 
결과적으로 노일전쟁의 승리자가 된 일본은, 총리대신 이등박문(이또오 히로부미)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정부를 위협하여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니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란거다.
 
이로써 조선의 독립주권을 상징하는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나라의 형체는 있으되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보호하에 놓인 "보호국"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을사년의 보호조약 체결에 찬성한 주무 관리가 "을사5적신"이고 그 이름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법부대신 이하영, 군부대신 이근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권씨가 하나 끼여 있네요)이다.
 
이 5적신은 100년이 다 된 지금도 그 자손이 어디가서 떳떳이 자기 조상을 밝히질 못하고 기를 못펴게 만든 못난 조상이고, 앞으로 두고 두고 민족사에 오명을 남긴 만고불변의 역적이다. 
그리고 5적신의 위에서 군림한 자가 소위 고종이라고 하는 이성림(李聖臨)이다. 그러므로 이치로 따지면 을사보호조약의 원흉은 1왕 5적신이라 불러야 옳다.
 
어찌하여  왕이라고 해서 민족사의 오점에서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인 노비근성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못난 왕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했으면 제일 먼저 왕부터 당해야 하거늘 어째서 왕만 빠지고 신하들만 5적신으로 만고에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어야 되는가 말이다.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대표해 왔다.
진시황, 나폴레온, 진기스칸,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고려 건국전의 태봉국 궁예, 그리고 왕은 아니지만 독일의 히틀러 이런 사람들의 예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나라 백성들은 인심이 너무 좋아서  나라가 망한 시점에서 그 정점에서 왕노릇 했던 고종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도 모자라 마치 홀로 구국 공로자인양 청사에 빛을 밝혀주고, 그 밑의 애꿎은 신하는 자의든 타의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죄로 만고역적 모자를 씌워 놓고 쓴 웃음을 짓고 있다.
 
요사히 재벌 비리가 적지 않은데 그 총수에 대한 국민들의 자세도 어쩌면 이와 그리도 흡사한가. 
아-- 노비근성 노비근성 참으로 개탄할 노비근성이로다.
 
우리의 안중근은 "척결"의 용사 형님이셨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자 하셨고,  그 핵심 자체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척결"의 용단을 내리신 분이므로 두고 두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으시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의인들 조차  안의사를 받들어 모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을사조약으로 인해 안중근의 부친은 울화병으로 심신이 더욱 중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부친과 은밀히 다음과 같이 상의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했을때, 일본이 전쟁을 선포하는 글 가운데,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고 해 놓고, 이제 일본이 그같은 대의를 지키지 않고, 야심적인 책략을 자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일본의 대정치가인 이또오의 정략입니다. 먼저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다음으로 유지당(有志黨)을 없앤 뒤에 강토를 삼키려는 것이 현재 나라 망치는 새 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손을 마주 쥐고 아무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의거를 일으켜 이또오의 정책에 반대한단들 강약이 같지 않으니 부질 없이 죽을 뿐,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청국 산동과 상해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 가 살다가, 선후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면 제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살펴 본 뒤에 돌아 올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그 동안에 비밀히 짐을 꾸린 뒤에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평안남도에 있다)로 가서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오는 날 다시 의논해서 행하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부자간에 의논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곧 길을 떠나 산동 등지를 두루 다녀 본 후에, 상해에 당도했다.  
자 그럼 우리도 상해에서 발걸음을 멈추기로 합시다.
 
 짜이 지엔.   
기사입력: 2008/08/01 [17:47]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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